일제 강점기, 일본 자본이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던 시절— 그 속에서 ‘한국인이 직접 세우고 운영한 백화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종로 네거리의 상징이자, 근대 소비문화의 출발점이 된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입니다.
1930년대 조선 사회에서 백화점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문명과 근대, 신여성과 도시인의 상징이자, ‘조선도 할 수 있다’는 자존심이 담긴 공간이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은 그 한복판에서 조선인의 자본과 근대적 욕망이 교차하던 무대였습니다.

1.“화신”이라는 이름의 시작
‘화신’이라는 이름은 원래 한 상인의 가게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90년대 말, 신태화라는 상인이 귀금속 상점 ‘신생상회’를 열었고, 1918년에 자신의 이름 ‘화(華)’와 신생상회의 ‘신(信)’을 따서 ‘화신상회’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 화신상회는 1920년대 들어 백화점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시장의 변화와 경기침체로 경영난을 겪게 됩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박흥식(朴興植)이었습니다. 그는 지물(종이) 사업으로 큰돈을 벌며 신흥 부호로 떠오른 인물이었습니다.
박흥식은 위기에 빠진 화신상회를 인수하면서 ‘조선인이 세운, 조선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세웠습니다. 그는 낡은 목조건물을 허물고 3층 콘크리트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선택이었습니다.
2. 1935년 대화재, 그리고 더 큰 부활
하지만 새 건물이 세워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이 찾아옵니다. 1935년 1월 27일 저녁, 화신상회에 대형 화재가 발생해 건물이 통째로 불타버린 것입니다. 당시 목재와 혼용된 구조 덕에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종로 일대가 불길과 연기로 뒤덮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흥식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년 뒤, 불탄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의 초대형 콘크리트 백화점을 세웠습니다. 이 건물은 1937년에 완공되었으며, 조선 최초로 엘리베이터 4대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갖춘 당대 최첨단의 현대식 건물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처음 본 조선인들은 그 움직임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 한 번 타봤다”는 게 자랑거리였고, ‘화신백화점 구경 갔다’는 말이 서울 나들이의 상징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3.전국을 휩쓴 ‘화신 열풍’
화신백화점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박흥식은 백화점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화신연쇄점(체인점)’을 열며 유통망을 확장했습니다.
1936년에 시작된 이 연쇄점 사업은 불과 1년 만에 전국에 350개가 넘는 점포를 거느릴 정도로 급성장했습니다. ‘화신’이라는 이름은 당시 소비자들에게 ‘신뢰’, ‘품질’, ‘근대’의 상징이 되었고, 조선인들도 “우리 손으로 만든 근대의 상징”이라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백화점 내부에는 최신 유행의 의류, 가정용품, 잡화가 가득했고, 6층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냉면’이 일품이었다고 합니다. “화신 6층에서 냉면 먹었다”는 말이 일종의 ‘신분적 자랑거리’로 회자될 정도였죠.
또한 건물 옥상에는 정광판(전광판)이 설치되어 그날그날의 뉴스를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도심 속 실시간 뉴스 스크린’ 같은 역할을 한 셈이죠.
서울 남촌에 있던 일본인 백화점 미쓰코시를 능가한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화신백화점은 곧 ‘조선인의 근대화 상징’이 되었습니다.
4. “근대건축의 자존심” — 조선인 건축가의 작품
화신백화점은 단지 크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이 백화점은 근대 건축 교육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조선 최초의 서양식 상업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조선의 기술과 디자인이 일본 건축 수준에 도전한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화신을 “민족 자본의 자존심”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5. 그러나 그 번영은 완전히 ‘조선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박흥식은 식민지 시대의 자본가로서, 그의 자본이 완전히 ‘민족자본’이라 부르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었습니다.
1936년 무렵, 그는 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식산은행에서 3,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대출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의 민간사업가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금액이었죠.
그에게 자본의 출처나 성격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키우는 돈’이라면 그게 일본 자본이든, 식민정부의 돈이든 상관없었습니다.
화신은 오사카에 영업소를 두고 일본 상품을 대량으로 수입해 조선 전역의 매장에서 판매했습니다. 결국 조선의 시장은 화신을 통해 일본 상품의 소비처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학계에서는 화신의 자본을 ‘매판적 상업자본’(식민지 권력에 협조하여 일본의 경제이익을 대행한 자본)이라 평가하기도 합니다.
6.박흥식, ‘조선의 거부(巨富)’에서 ‘친일 논란의 인물’로
박흥식은 그야말로 1930~40년대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업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화신백화점뿐 아니라 인쇄, 영화, 비행기 제조업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그는 “조선에도 산업가가 나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명성을 누렸죠.
하지만 일제강점기 후반, 그는 여러 친일 단체에 참여했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같은 군수 산업에도 관여했습니다. 결국 해방 이후 그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조선 자본가의 성공과, 식민지 체제 속 협력의 상징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7.화신의 마지막 — 종로에서 사라진 근대의 자취
시간은 흘러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화신백화점은 점점 힘을 잃어갔습니다. 1950년대 이후 신생 백화점들이 생기고, 소비문화가 변하면서 그 영향력은 줄어들었습니다.
결정적인 변화는 1978년 종로 확장 계획이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이 있던 공평동 일대가 도심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건물의 절반이 도로 확장 구간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 새로운 건축 허가가 떨어지며 화신백화점 건물은 완전히 철거되었습니다.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 — 그곳이 바로 옛 화신백화점 터입니다. 그 화려했던 쇼윈도와 에스컬레이터, 냉면의 향기, 전광판에 떠오르던 뉴스는 이제 사진 속 기억으로만 남았습니다.

8.화신백화점이 남긴 의미
화신백화점은 분명 식민지 시대 조선의 상징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근대의 찬란함과 식민의 모순이 동시에 존재햇습니다.
무엇보다 이 백화점은 ‘조선인이 경영한 최초의 대형 백화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세운 근대’라는 자부심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고령의 어른신들은 화신백화점을 기억하고 간혹가다 이야기를 하실정도로 큰 의미를 가졌던 백화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번영은 식민권력의 체제 속에서 만들어졌고, 박흥식의 화신은 ‘민족자본의 성공’이자 ‘식민경제의 도구’라는 아이러니한 이중성을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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