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일파’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 가장 먼저 조국을 배신한 인물 — ‘친일파 1호’ 김인승(金麟昇)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합니다.
이완용보다 수십 년 앞서, 조선이 식민지가 되기도 전에 일본의 손을 들어준 사람.
그의 이름은 김인승이었습니다.
1. 조국이 버린 인재
함경북도 경흥 출신의 김인승은 16세에 관직에 오를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조선은 이미 부패로 썩어 있었습니다. 세도정치와 뇌물, 줄 세우기… 능력보다 돈과 혈연이 중요했던 시대.
이 젊은 관리는 결국 상사와의 불화 끝에 조국을 떠나 러시아로 망명합니다.
그의 첫 번째 배신은 일본이 아닌 조국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 썩은 나라에 내 재능은 낭비된다’는 분노가 자리했죠.
이후 그는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에서 조선 유민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며 살았지만, 마음속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문을 스스로 닫은 채, 다른 세계로 향할 운명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2. 일본과의 만남 — 뒤틀린 동경의 시작
러시아에서 그는 일본 외무성 인사 세와키 히사토를 만나게 됩니다. 세와키는 조선 정세를 탐색하던 ‘정탐꾼’이었고, 김인승은 그에게 완벽한 협력자였습니다.
조선의 내부 사정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조국에 환멸을 느낀 조선인,
그야말로 ‘이용하기 좋은 자산’이었습니다.
세와키는 그를 일본으로 데려갔습니다. 1875년, 김인승은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3. 문명에 압도된 영혼
그가 본 일본은 자신이 알던 ‘왜국’이 아니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일본은 철도와 증기기관차, 벽돌 건물, 서양식 군복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조선의 낡은 성리학적 질서와 비교했을 때, 일본의 변화는 혁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압도당했고, 동시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힘에 편승해야 산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일본 외무성은 김인승을 외국인 고문으로 채용합니다. 높은 급여와 대우는 그에게 ‘능력의 인정’이었습니다.
조국에서 버림받은 그를 일본이 인정해준 셈이었죠.
그 순간, 그의 충성심은 완전히 일본으로 옮겨갑니다.

4. 강화도 조약 — 조국의 심장에 칼을 꽂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를 침입해 조선군과 교전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을 협박하며 강제 수교를 추진합니다.
이때 일본 협상단의 ‘통역관’으로 합류한 인물, 바로 김인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조선 침략의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일본 군사 지도 제작에 조선의 지리를 제공하고,
『계림사략』이라는 조선 내부 정보집 제작에도 자문을 맡았습니다.
조선의 속살을 일본의 손에 넘겨준 셈이었죠.
또한 그는 조선 관리들의 심리를 분석해 “어떻게 설득하고 협박해야 하는지”를 정리한
‘조선 관리 설득 방책 18개 항’을 일본 측에 제출합니다.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조약이라는 개념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일본은 김인승의 말과 관료들의 태도를 고려 해보면 보인들의 계획대로 갈 수 있음을 알 수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1876년 2월 27일, 조선은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되고 맙니다
조선의 해안 측량권, 치외법권 등 국권을 송두리째 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조약의 그림자 뒤에는, 조선인이면서 조국을 무너뜨린 김인승의 손이 있었습니다.
결국 김인승은 조선이 일본에 먹히는 시작점에 서게 되면서 친일파 1호가 되어버렸습니다.

5. 이용당하고 버려진 인물
그토록 일본을 동경하고 충성했던 김인승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져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조약 체결 후 일본입장에서는 쓸모를 당했거라고 추측하는 바 입니다 그리고 충성심이 심한 일본은
김인승을 보았을 때 “조국을 팔아먹은 자가 어찌 우리를 배신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 하지 않을까요~
결국 일본인들에게 그는 ‘쓸모 있는 배신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 “거리를 걸을 때마다 두렵다”는 편지를 남기것을 보면 그는 조국에게 버림받고, 일본에게도 버림받은 남자.그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인물이 되었습니다,
6. 역사가 내리는 냉정한 심판
김인승은 처음부터 악인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는 단지 조국에 대한 환멸과 인정 욕구에 사로잡힌 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비극은 그 감정이 ‘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선택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그가 동경한 일본의 ‘문명’은 결국 침략의 힘이었고,
그가 ‘진보’라 믿었던 길은 조국을 파괴하는 칼날이었습니다.
김인승은 역사의 첫 친일파로 기록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의 배신이 탐욕이 아니라 ‘환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조국에 대한 실망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때,
그 결과는 개인의 비극을 넘어 민족의 상처가 된다는 것을
역사는 냉정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친일파 1호’ 김인승.
그는 조국을 배신했지만, 동시에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조국을 향한 분노가, 언제부터 조국을 향한 칼이 되었는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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