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인플레이션] 경복궁 복원이 불러온 경제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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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조선의 인플레이션] 경복궁 복원이 불러온 경제의 붕괴

by 5914 2025.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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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당시 실세 였던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시작된 경복궁 복원을 추진 하였으나  결국 조선 경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중심에는 흥선대원군이 발행한 당백전(當百錢)이라는 화폐가 있었고, 이 화폐는 조선의 경제 질서를 뒤흔든 주범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 시기의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흥선대원군과 경복궁 복원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열두 살의 고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을 맡으며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 시기의 조선은 세도정치로 국정이 문란했고,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이 오랫동안 정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약화를 조선 혼란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왕이 머무는 궁궐이 무너진 나라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조선 왕조의 상징이었던 경복궁(景福宮) 복원을 추진했습니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마친 뒤 1395년에 완성한 궁궐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이후 약 27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다시 세우는 것이 왕권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재정은 텅 비어 있었고, 농민들의 생활은 흉년과 세금으로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

2. 돈이 없던 조선, 화폐를 만들어내다

1865년, 경복궁 복원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궁궐 재건에는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먼저, 그는 원납전(願納錢)이라 불리는 헌금을 걷었습니다. 이름은 자발적인 기부금이었지만, 실제로는 양반과 부자들에게 강제로 돈을 내게 한 제도였습니다. 또한 전국의 사찰 재산을 몰수하고, 농민들을 강제로 공사에 동원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도 부족하자, 흥선대원군은 마지막으로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백전입니다.

 

3. 당백전의 발행과 구조

1866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동전을 발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당백전은 이름 그대로 기존의 상평통보 100배의 가치를 지닌다고 선언된 동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폐의 실제 가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백전은 상평통보보다 구리의 함량이 5~6배 정도 높았지만, 100배의 가치를 지녔다고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즉, 명목 가치는 100배지만 실제 가치는 10배도 안 되는 화폐였습니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이를 강제로 유통시키며 공사비에 충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시중에 돈은 넘쳐났지만, 그 돈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전형적인 인플레이션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4. 인플레이션의 발생

당백전이 시장에 풀리자 처음에는 거래가 활발해졌습니다. 돈이 많아진 듯 보였고, 궁궐 공사도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시장의 불안이 시작되었습니다.

상인들과 백성들은 당백전이 가볍고 구리빛이 탁하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이 화폐의 가치를 믿지 못했고, 결국 당백전을 거부하는 상인들이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기존 화폐인 상평통보나 은전을 숨겼습니다. 그 결과, 시장에는 가치 없는 돈만 넘쳐나게 되었고, 거래가 점점 중단되었습니다. 이것이 조선에서 본격적인 인플레이션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5. 물가의 폭등과 민생의 파탄

당백전이 발행된 이후 물가는 급격히 올랐습니다. 《고종실록》 《승정원일기》에는 당시의 혼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쌀 한 섬의 값이 하루아침에 여섯 배로 뛰었다. 백성들이 쌀을 구하지 못해 길마다 통곡하였다.”
 《고종실록》, 1866년

기록에 따르면, 쌀값은 약 6~10배까지 폭등했습니다.

품목인플레이션 이전인플레이션 이후상승률

쌀 1섬 (약 180리터) 1냥 5전 9~10냥 약 6~7배
보리 1섬 1냥 7냥 이상 7배
면포 1필 1냥 6냥 이상 6배 이상

당시 농민의 하루 품삯은 약 5~10전 정도였습니다. 즉, 한 달을 일해도 쌀 한섬을 사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거래는 줄고, 장터에서는 은전이나 옷감으로 물건을 교환하는 물물교환 형태의 경제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6. 경제의 마비와 민심의 악화

물가가 오르자 백성들은 세금을 낼 수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상인들은 장사를 포기했고, 관리들은 녹봉(급여)을 받아도 실질 가치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경제 전체가 마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흥선대원군은 공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권의 상징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국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당백전을 더 찍어냈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가속시켰습니다.

유학자 최익현(崔益鉉)은 이 사태를 비판하며 상소를 올렸습니다.

“당백전은 백성의 피를 구리로 만든 것이다. 궁궐은 서 있으나 백성의 삶은 무너졌다.”

이 상소는 조선 조정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고, 당백전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습니다.

7. 경복궁의 완성과 흥선대원군의 몰락

1868년, 약 3년간의 공사 끝에 경복궁은 완공되었습니다. 총 7,700여 칸에 달하는 웅장한 궁궐이 세워졌고, 왕권의 상징이 다시 한양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궁궐은 경제 붕괴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파탄났고, 시장의 질서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흥선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가 남긴 것은 새로 세워진 궁궐이었지만, 그 궁궐은 조선 경제가 붕괴된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8. 인플레이션 이후의 조선

당백전은 발행 2년 만에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경제의 신뢰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정부가 발행한 화폐를 믿지 않았고, 시장에서는 은전이나 외국 화폐가 선호되었습니다.

조선의 재정은 다시 악화되었고, 이후 개항과 외세의 압박 속에서 자주적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하게 됩니다. 경복궁 복원은 분명 조선의 정치적 상징을 되살린 사건이었지만, 그 뒤에는 화폐 신뢰의 붕괴와 인플레이션이 뒤따랐습니다. 결국 화려한 궁궐은 남았지만, 그 궁궐을 세운 나라의 경제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맺음말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복원은 조선의 마지막 ‘왕권 회복’ 시도였습니다. 그는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재정의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당백전 발행은 단기간의 자금난을 해결했지만, 그 대가로 조선은 화폐 가치 폭락과 인플레이션이라는 경제적 재앙을 맞았습니다. 결국 왕권을 세우기 위한 사업은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경복궁의 아름다움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 경제가 무너졌던 아픈 역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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