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를 역사 공부를 하게 되면 훈구파 사림파 단어들이 계속 나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에 대해 설명들이 잠깐 나오기는 하는데 좀 더 심취 있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왕들은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도 알아보겠습니다.
1. 공신 훈구파
훈구파를 쉽게 생각하려면 조선 초기 공신 세력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조카 단종의 욍의자리를 찬탈하는 발판을 만들었는데 이때 세조를 도왔던 한명회 정인지 권람 등의 대신들을 공신으로 책봉됩니다. 그 후 사육신사건과 이시애난에서 공을 세운 신숙주, 유자광과 함께 공을 세운 대신들도 공신이 됩니다. 이들은 공신이므로 나라에서 많은 땅과 재물 노비등을 하사 받았으므로 상당한 부와 정치세력을 갖고 있었던 훈구파였습니다. 이들은 세조에 이어 예종에도 권세를 유지되었으며 성종 때 와서 사림파의 견제가 심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많은 훈구파 대신들이 많은 죽음을 당했지만 2년 후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훈구세력의 중심으로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이복동생인 중종을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이 훈구파들은 또 공신이 되고 다시 조정을 장악하여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성종 때부터 훈구세력 가문끼리 결혼을 통해 세력을 강화했으며 왕가와도 혼인을 하여 외척세력으로도 키워 나갔습니다.
2. 사림파
사림파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들은 이들은 고려의 충성을 지키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후손 들입니다.
전몽주 -길재 -김종직- 김일손 사제지간으로 인해 그들의 학문과 사상이 전해지게 됩니다. 사림파가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김종직이 성종에 신임을 얻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주로 사간원, 사현부, 홍문관등 언론 3사에 관리로 등용되어 훈구파 세력들을 많은 견제를 하게 됩니다. 성종 때는 경연을 통해 왕과 많은 학문을 나눌 수 있어으나 연산군 때는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으로 무오사화를 당하여 많은 사림파들이 죽었습니다. 그 후 중종 때 사림파인 조광조가 중종에게 발탁되어 4년간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림파는 죽음을 당하거나 파직됩니다. 조선중기 때부터는 사림파들이 세력을 장악하지만 그 안에서 다시 세력들이 갈라져서 붕당이 이루어집니다. 사림은 성리학을 사상을 기반으로 유교사상을 중요시했으며 의리와 절개 명분을 강조했습니다.
3. 그리고 조선의 왕
사림파가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이 왕이 이들을 등용했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훈구파 세력들이 거의 장악하였습니다. 성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사림파의 중심인 김종직과 그를 따르는 사림출신을 등용하여성종의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을 사헌부. 서간원, 홍문관 언론 3사에 주로 임명해서 훈구파 세력들을 견제하게 만들었습니다. 성종은 이 두 파를 적절하게 대립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왕권을 지켜나갔습니다.
연산군은 훈구파 사림파 모두를 불편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학문이 깊은 성종과는 달리 연산군은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있는 왕이 아니어서 왕의 도리를 말하는 대신들과의 갈등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특히 사림파와 갈등이 깊었습니다. 훈구파인 유자광이 사초에서 세조를 비방하는 김종직의 조의제문 글을 연산군에게 올립니다. 연산군의 크게 분노하여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과 사림출신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거나 파직을 가합니다. 이 사건이 무호사화입니다. 몇 년 후 훈구파도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윤 씨 사건으로 연산군에게 죽음을 당하는 갑자사화를 맞게 됩니다. 연산군은 이 두 파를 사화를 일으켜 왕위를 지켰지만 결국 폐위가 되어버립니다.
중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훈구파 세력에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중종이 8년쯤에는 성종과 마찬가지로 사림파를 이용해 왕권을 지키려고 사림 출신 조광조를 등용합니다. 그러나 조광조의 빠른 개혁들이 오히려 자신의 왕좌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훈구파의 계락에 넘어가서인지 중종은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림파를 죽이거나 파직합니다. 그 후 남곤을 중신으로 한 훈구파가 권세를 잡았습니다.
중종은 대신들의 권력을 한쪽으로 몰아주고 그 권력이 너무 커지면 그 권력을 없애는 방법으로 왕의 권위를 지켜나간 왕입니다. 훈구파나 사림파 모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공부한 대신들이지만 각자 생각하는 길이 틀려서 서로 대립과 갈등을 반복했던 대신들입니다. 훗날 훈구파는 자연 소멸되지만 사림파 안에서 또 다른 파들이 나눠지면 당파싸움은 조선 후기까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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