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이 조광조를 버리기 위해 일으킨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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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중종이 조광조를 버리기 위해 일으킨 기묘사화

by 5914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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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훗날 이황, 이이, 조식등  우리 잘 아는  조선학자들의 존경과  정신적인 멘토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중종을  만나  중종의  총애를  받고 중종에게  버려져 죽음을  당합니다.      이 글에서는  중종, 조광조 그리고  기묘사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중종반정

중종을  알기 위해서는 중종반정에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중종반정은 1506년에  훈구세력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중심으로  당시  폭군이었던 10대 왕 연산군을  폐하고  그 자리에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입니다. 중종반정은  하룻밤에  일어난  사건으로 진성대군(중종 )의 장인인  신수근과 임사홍 장녹수 등이 반정세력들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진성대군(중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이 되었고  부인을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이  버려야만  했습니다.
중종반정 이후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공신이 되어  주된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아 버렸습니다.
 

2. 중종

중종은 1488년에 태어나서 1544년에 생을  마감 했습니다  중종은  1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506~1544년까지입니다.
중종은  성종의 아들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입니다.  
서열로  따진다면  중종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나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이러났고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중종은 세자시절이  없는 왕으로  왕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초기에는 역모 사건들도 자주 일어났고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공신들의 정치세력이  커서  중종은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그래도 중종은  연산군 지우기로  금표철폐, 서총대 철거, 채홍사 해체등을  하였고  홍문관과 서간원을  다시 복귀했으며 경연도 다시 참가하였습니다.
중종 8년 전후로  세력의 기득권을 가졌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 3인방이 모두 사망하자  중종은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그나마 만들어집니다.  중종은  기존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할 수 있는 신진세력이  필요했을 때  조광조가 중종의 눈에  들어옵니다.  중종은  조광 조을 등용 하여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펼치려  했습니다만   개혁의  방법이  중종의  뜻과  달라서 인지 결국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시진사류들은  기묘사화로 숙청합니다.
조광조에  이어  중종은 남곤에게  힘을 실어 줍니다.  남곤이  죽은 뒤   파직 당한 김안로를  다시 복직 시켜서  김안로를  적극 지원 해줍니다.  김안로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고  자신과  배척한  대신들을  모함하여  파직시키거나 유배를  보내 버립니다.
문정왕후를  배경을 둔 윤원형, 윤원로 형제가 등장으로 김안로가  숙청되지만  이 형제들도  횡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중종은  재위기간이  39년으로   다른 왕들 비해  꽤 긴 편이었으나  뚜렷한  업적이  없는 왕입니다.
중종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왕이라기보다는 왕의 자리를  어떻게  하면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왕으로  보입니다.


 

3, 조광조

조광조는 1482년에  태어나서 1520년에  사사됩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출신인  김광필의  제자로  들어가  유교적 이상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조광조는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합니다. 중종은  조광조의 뛰어난 학문을  알아보고  그를  총애합니다.
조광조는 중종에  총애를 안고 개혁을  시작하는데  조광조는  관료 초기 때는  상소문 하나로 모든 사간원들을 모두 파직을  권하여  사간원의 관료들이  교체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도덕적 왕도정치를  하려고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향약"과 "소학"을  널리 알리려고 했습니다.  또  조광조는 과거제도가 아닌 추천을 통해 인재들을  뽑는 기관 현량과를 만들어서  신진사류들을  많이 등용했습니다.  궁 안에  여인들이  기도하는 도교문화인 소격제 폐지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때  중종은  소격제 폐지를  주춤하였으나  조광조의  추진력으로  결국 소격제를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국공신들의 개정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중종반정 때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공신이름만  올린 이들이  많았던 것 사실입니다.  조광조는  그들을  구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중종은 조광조 뜻과는 달랐는지  이 일로 둘은  논쟁을 하였으나  중종은 조광조의  뜻을  꺾을  명분이  없어서  정국공신 개정을  실시합니다.
이런 개혁들이  4~5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정국공신 개혁을  마지지막으로 기묘년 11월 15일 밤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조광조는  영문도 모르는 체  잡혀왔고 중종을 뵙기를 청하였으나  거부당하고 맙니다.
그 후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사사되어 생을  마감합니다.  
성리학을  깊이 공부한 인물로  몸소 유교 사상을  실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조광조는 정치개혁에는  실패하였으나 후세 학자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있다면  조광조는  너무 빠른 속도로  개혁을  이루고자 한 것은 아닌지~  

4. 기묘사화

1519년 (기묘년) 11월 15일 한밤 중에 중종은 남곤, 홍경주, 심정, 김전을  불러  밀지를 내려 조광조, 김구, 김정, 김식,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이  투옥되는 되었습니다.  그들의 죄는 조광조일파가 조직, 조정을 문란시켜서  탄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광조는 소격서 폐지와  정국공신 개정으로  중종과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어지만  이렇게  갑자기 자기 자신을  역적으로 만든 것이  큰 충격이 었는지 투옥된  감옥 안에서 한 없이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중종은 조광조를  바로  죽이고  싶어 했지만 영의정인 정광필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였고  조광조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대신들도  젊은 신하들을  이리 죽일 수는 없다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150여 명의  성균관 유생들도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데이어  궐 안 난입하여  통곡을 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대신들은 조광조의  빠른 개혁을 맘에  들어하지는 않았지만  조광조를  이렇게  이유도 모른 체  죽게 할 수 없는지 중종을  압박하는 상소를 올리지만  중종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조광조를 파직하여  유배 보내어  유배지에서  사사하였고  그를 따르는  사류세력들은  모두 파직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입니다.  알려진 바로는 남곤, 홍경주 중심으로 훈구파 세력들이  조광조를 없애기  위해 "주초위왕"이라는  한자를 나뭇잎에  꿀로  써서 벌레가  먹도록 하였고 그 나뭇잎을 후궁을 통해  중종에게 보여 주면서  조 씨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 도성에  떠돈다고 말하여서 중종이 화가 나서  조광조를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 학자들은 기묘사화의 주도자는 중종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훈구파들도 조광조를 싫어 한것을 사실이지만 중종 또한  소격서폐지와 정국공신 개정 이후 조광조에게   감정이 많이 좋지 않았습니다.   조광조의 개혁들이 중종의 생각에서 나와 이루어져야  하는데  조광조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개혁들이 이루어졌고 일부 개혁은 중종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개혁들이  중종 입장에서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바른말만 하는 조광조를  말로 이기기에  중종은  학식이 많이 부족하였고  조광조  따르는 이들도 점점 많아지면서  왕의 자리도 위태롭다고 생각 했을 것 같습니다.  중종은  조광조는 왕을 위해 충신 하는게  아니라  그가 공부한 성리학  유교사상을  위해  충신하는 것으로 판단한  것 아닌지 예측해봅니다. 기묘사화는 무능한 중종이 능력이 뛰어난 조광조를 감당 못해 결국 죽여서 자신의 권위를 지킨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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