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1대 중종의 계비로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통해 조선의 막강한 권력을 잡았던 여인입니다. 그녀의 생애와 그 당시의 정치적 사건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문정왕후 중전이 되다.
문정왕후는 1501년에 태어나 1565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비록 양반으로서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정경왕후 가문에 윤 씨 집안이었습니다. 당시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정경왕후가 아들(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합니다. 보통 중전이 사망하면 왕의 후궁에서 중전을 뽑는데 아직 아기인 인종의 안위가 걱정된 외삼촌 윤임은 어린 인종을 보살펴줄 왕비로 자신의 가문의 처녀인 문정왕후를 중전으로 밀었습니다. 17세 나이로 중전에 자리에 오른 문정왕후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왕의 후궁들의 등쌀을 맞아줄만한 힘도 없었고 또 문정왕후는 줄줄이 딸만 낳고 아들이 없어 궁중 생활은 녹녹하지 못했습니다.
문정왕후는 세자(인종)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지켜나갔습니다. 바늘 방석같은 국모를 자리 지켜나가는 그녀는 그의 나이 30대 후반에 거의 20년 만에 드디어 아들(명종)을 낳게 됩니다.
아들을 낳으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임장에서는 지금의 세자보다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중종은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복위에 오르고 맙니다. 이젠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이 될 확률이 거의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복위에 오른 인종은 왕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후사없이 죽는 바람에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은 12세 나이에 드디어 왕이 됩니다. 이때부터 문정왕후는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2. 문종왕후 수렴청정하다.
수렴청정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가 성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때 정희왕후는 신화들의 보고를 받고 결과를 수긍하는 분위기로 이루어졌지만 문정왕후는 자신이 직접 정권에 개입하였습니다. 문정왕후는 기존의 조선의 여인과 달리 한문을 읽고 쓰는데 능하여서 정치를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그녀가 명종을 낳으면서 조선에는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파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정권을 잡으면서 자신을 핍박했던 윤임과 그의 일파 대윤파를 제거합니다, 이 사건을 을사사화라고 합니다. 그녀는 동생 윤원형과 그이 첩인 정난정과 함께 많은 권력과 부를 쌓았습니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20세 나이에 수렴청정을 그만 두었으나 명종의 정치에 일일이 간섭하는 방식으로 실직적으로는 정권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특히 윤원형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삶이 힘들었는데도 명종은 이를 해결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문정왕후의 권세는 20여 년을 이어나갔으며 그녀의 죽음으로써 권세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녀가 죽은후 신하들은 윤원형의 강력한 탄핵을 명종에게 촉구했고 명종은 바로 받아 들여 윤원형과 그의 첩인 정난정을 유배 보내버렸다 이 둘은 윤원형의 본처 독살했다는 사건까지 고발되자 결국 둘은 유배지에서 음독자살을 합니다.
3. 문정왕후 불교를 부활시키려 하다.
조선시대는 유교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으로 불교를 배척해 왔습니다. 그러나 고려 이전시대부터 자리 잡고 있던 불교는 조선에는 불교신자들이 많았고 조선 왕실의 여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문정왕후도 불교신자였으며 승려 보우를 만나 불교를 크게 육성시키려 하였습니다. 불교의 부활에 성리학자들은 많은 반대를 하였으나 도첩제 실시와 많은 승려 육성 등 문정왕후는 불교계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불교께는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승려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 바로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제주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4.을사사화
을사사화는 앞에서 잠깐 다룬 대윤과 소윤의 대립된 과정에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면서 윤임과 윤임을 따르는 무리들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인종의 외 삼촌인 윤임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대윤이고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로와 윤원형을 따르는 이들은 소윤이라고 했습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윤인 송인수 등으로부터 윤원로를 파직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인종을 업고 대윤의 세력은 커져으며 소윤의 세력은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종이 8개월 만에 죽고 문정왕후가 어린 왕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대세는 소윤 쪽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재 등용된 윤원로는 윤임 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명종이 대군시절에 대윤파들이 명종을 헤치려고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유인경과 좌의정 유관이등 유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윤원로과 윤원형은 대윤을 없애는데 실패하자 다시 윤임의 조카인 봉성군을 왕위에 옮기려는 계략을 꾸미고 이를 같이 도모한 인물들이 대윤파에 속한 유관과 유인숙이라고 소문을 퍼트립니다. 이로써 윤임, 윤관, 유인숙 등은 유배되어 사사되었습니다.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을 시작해 대윤의 세력들은 사형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그 후 2년 뒤 문정왕후 정권을 비방하는 벽서가 양재역에 발견된 사건으로 남아있는 대윤파인 봉성군과 송인수 등이 사형당하고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로 윤원형 음모로 화를 임은 대윤 파는 100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윤 씨 집안에 외척 간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훈구파가 사림파를 공격한 사건이 을사사화입니다.사림파는 연산군 시절부터 50년간 4차례의 사화를 겪는데 이 을사사화가 마지막 사화 입니다. 사림파는 을사사화로 세력이 많이 약해졌으나 선조 때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합니다.
5. 문정왕후의 평가
문정왕후의 평가는 썩 좋지가 않습니다. 동생인 윤원형과 그의 첩인 정난정의 부정부패를 모르 척했고 나라의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을사사화로 많은 인재들은 죽였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삶이 무척 힘들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는 임꺽정도 문정왕후 때 인물입니다. 아들인 명종을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았던 문정왕후는 오늘날 비정한 모후이면 조선의 부정부패을 무인 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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