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일제시대' 카테고리의 글 목록 (2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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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38

태조이성계는 아들 태종 이방원을 한번도 후계자로 생각한적 없다. 태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후 수월하게  1393년에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이성계 입장에서 정몽주가 필요하였는데 이방원이 죽게 하였으니 이성계는 그 후 아들 이방원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남 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버린 이성계와 이방원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1. 이방원은 이성계의 자랑이었다이방원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여 이성계와 그의 두번째 부인까지 이뻐하였습니다.  무신 집안에서 처음으로 17세 어린 나이에 과거시험에 급제를 하여 집안에 처음으로 문신으로 출세 길에 오른 아들이  이성계에게 자랑이었으며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나라의 건국을 계획을 하였을때도 이성계에게 있어 이방원은 큰 힘이었습니다.그러나 앞서 이방원이  스승인 정몽주를 살해한 후는 이방원을 멀리 하기 .. 2025. 1. 12.
조선의 왕이 사용하는 천막으로 권력이 무너지는 사건들 임금님의 천막을 용봉차일이라고 합니다. 용과 봉화이 그려져 있는 천막으로  나라의 중요한  잔치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이 천막때문에  권력이 무너지는 두 가지 사건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 한명회의 압구정 사건 한명회는 세조를 왕으로 올리는데 일등공신이며  영의정에 올랐으며 예종과 성종의 장인어른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세조, 예종이 죽은 후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성종대 까지 한명회의 권세는 시들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어느새 한명회의 나이도 60세가 넘어가고 성종 또한 자신보다 높은 한명회의 권세가  못마땅한 나이가 되었습니다.당시 성종이 20세 되어  수렴청정을 거두고 직접 친정을 하려고 선언하였는데 한명회가 아직 성종이 친정을 하기에는 이르다며  반대를 하였습니다. 성종.. 2025. 1. 7.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권력실세 궁녀 김개시 광해군이 왕이 오르는데  도움을 주었고 광해군의 총애로 권력을  휘둘렀으며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던 어느  한 궁녀의 이야기입니다. 1. 궁녀에서 상궁으로김개시는 언제 태어나고 어디 출신의 사람인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의 이름을 통해 천민 출신이라고 추측을 할 뿐입니다. 김개시에서 시(屎)는 한자로 똥시입니다.  즉 한글로 풀어보면 이름이 김 개똥이라는 것입니다.  양반이나 양민 출신의 사람들에게는 잘 쓰이지 않는 이름으로 아마 천민 출신으로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10대 초반에 궁녀로 들어 온 것으로 추측이대고  김개시는 다른 궁녀와 다르게 문자를 잘 만큼 총명한 궁녀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일한 곳은 광해군의 처소였습니다.  광해군이 어린나이.. 2025. 1. 5.
원경왕후의 집안은 남편 이방원이 때문에 망하였다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이자 세종대왕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남편 이방원이 왕이 되는 과정의 큰 역할을 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그녀의 비극이었습니다 1. 그들의 만남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 씨는 권문세족 여흥 민 씨에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1365년에 여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원경왕후 민씨의 친정은 고려 최고의 명문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 민제는 성균관에서 사성을 지내며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민제는 성균관에서 어린 이방원의 총명함을 눈여겨보고 서는 자신 아끼는 딸 민 씨와 혼례를 올리게 합니다.민 씨는 외모와 총명함을 두루 갖춘 여인이었습니다.이방원은 민 씨의 처럼 명문 집안은 아니지만 당시 아버지인 이성계의 활약으로 무인집안인데도 불구하고 .. 2025. 1. 1.
무당 진령군을 맹신한 명성황후는 조선을 망국에 길로 들어서게 하다 진령군은 이름이 아닙니다. 고종이 내려준 칭호입니다.뒤에 군자를 붙여줄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왕자나 종친들이었습니다.  그런 칭호를  당시 사회적으로 천민 취급받는 무당에게 칭호를 내려다는 것은 그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은 무당 진령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명성황후를 위기에 빠지게 한  임오군란 사건 1882년  조선에는 별기군인 신식군대와 구식군대 있었습니다, 구시군대는 신식군대와 차별을 받았는데  가장 심각한 입금 체불이었습니다.  나라에서 13개월치에 달하는 월급을 받지 못해 항의를 하자  한 달 치 월급을 쌀로 지불하였습니다,그러나  군인들에 지급한 쌀 속는 많은 모래와 썩은 쌀들이 섞어 있었습니다.이로 인해 군인들은  분노하여 들고 .. 2024. 12. 30.
조선의 정신까지 지배하고 싶어했던 우리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3발의 총을 맞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원흉이라고 하며 그를 처단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 조선에게 얼마나 흉한 일을 하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가난한 농민 출신이 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까지 되다.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죠수번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 였습니다. 아버지가 이토 다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아버지 성이 이토로 바뀌면서  그도  이토 리스케가 됩니다.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개명한 이름입니다.이토 히로보미는 출세에 대한 욕심이 있어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고 이를 지켜본 본 사람이  메이지 유.. 2024. 12. 22.
영조는 완전 딸바보 였다. 영조가 사랑한 딸들의 이야기 영조는 많은 딸들이 있었습니다일찍 세상을 떠난 딸들을 빼고도 7명의 옹주가 있었습니다.  영조는 그 딸들 중 유독 이뻐했던 딸들도 있는가 하면 유독  미워했던 딸도 있었습니다. 영조의  유독 미움을 받았던  딸과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딸들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 화순옹주화순옹주는 1720년에 영조와  정빈 이 씨 사이에 1남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납니다.어머니인 정빈 이씨는 화순옹주가 태어난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친언니인 화억옹주는 첫돌도 안되어서  세상을 떠나고 오빠인 효장세자는 9살에 요절하여  그녀가 궁안에서 의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버지 영조뿐이었습니다.   영조의 장녀로 궁안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나  큰 궁궐 안에서 진심으로 의존할  사람이 없어 항상.. 2024. 12. 16.
고문귀신 친일경찰 노덕술은 이승만 정부에게 단죄가 아닌 훈장을 받았다 조선인을 일본 경찰보다 더 심하게 고문하였던 같은 민족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1. 일본 앞잡이 노덕술그는 1899년 울산 어느 지역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울산 보통학교 2하년에 중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는 상점 같은 데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해봤자 별 볼 일 없음을 깨닫고 1918년에 귀국해 일본 경찰이 되기 위해 순사교습소에 들어가 1920년에 일본 말단 경찰이 됩니다.그는 경찰이 된 후 승승장구를 하는데 1921순사부장, 1933년 경부(현, 경감) 1943년 경시로 승진하는데 이 자리에 오른 조선인 중에 21명뿐이며 노덕술을 제외한 조선인들은 좋은 집안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일본인들도 쉽게 오를 수 없는 자리였는데 말단 경찰이 그 자.. 2024. 12. 8.
영조의 두명의 왕후와 후궁들의 이야기 영조는 재임기간만 50년이 넘은 왕으로 2명의 왕후와 4명의 후궁이 있었습니다.가족들을 편파적으로 대한 영조는 그의 여인들은 어떻게 대했는지 그녀들의 일생은 어떤지를 알아보겠습니다.1. 정성왕후는 영조의 외면으로 외롭게 살다 외롭게 돌아가시다.그녀는 달성부원군의 딸로 1693년에 태어납니다. 13세때에 두 살이 어린 연잉군(영조)과 혼례를 합니다. 당시 영조는 연잉군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었습니다.어린나이에 혼례를 한 부부들은 웬만해서는 사이가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도 영조는 연잉군시절부터 정성왕후를 싫어했습니다.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둘의 첫날밤에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을 보면서 손이 이쁘다며 칭찬을 해주었는데 정성왕후가 원래 양반의 딸로 태어나서 고생을 안 해서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 2024.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