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일제시대23 영조는 몇몇 딸들에게 완전 딸 바보였다. 영조는 많은 딸들이 있었습니다일찍 세상을 떠난 딸들을 빼고도 7명의 옹주가 있었습니다. 영조는 그 딸들 중 유독 이뻐했던 딸들도 있는가 하면 유독 미워했던 딸도 있었습니다. 영조의 유독 미움을 받았던 딸과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딸들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 화순옹주화순옹주는 1720년에 영조와 정빈 이 씨 사이에 1남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납니다.어머니인 정빈 이씨는 화순옹주가 태어난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친언니인 화억옹주는 첫돌도 안되어서 세상을 떠나고 오빠인 효장세자는 9살에 요절하여 그녀가 궁안에서 의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버지 영조뿐이었습니다. 영조의 장녀로 궁안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나 큰 궁궐 안에서 진심으로 의존할 사람이 없어 항상.. 2024. 12. 16. 고문귀신 친일경찰 노덕술은 이승만 정부에게 단죄가 아닌 훈장을 받았다 조선인을 일본 경찰보다 더 심하게 고문하였던 같은 민족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1. 일본 앞잡이 노덕술그는 1899년 울산 어느 지역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울산 보통학교 2하년에 중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는 상점 같은 데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해봤자 별 볼 일 없음을 깨닫고 1918년에 귀국해 일본 경찰이 되기 위해 순사교습소에 들어가 1920년에 일본 말단 경찰이 됩니다.그는 경찰이 된 후 승승장구를 하는데 1921순사부장, 1933년 경부(현, 경감) 1943년 경시로 승진하는데 이 자리에 오른 조선인 중에 21명뿐이며 노덕술을 제외한 조선인들은 좋은 집안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일본인들도 쉽게 오를 수 없는 자리였는데 말단 경찰이 그 자.. 2024. 12. 8. 영조의 두명의 왕후와 후궁들의 이야기 영조는 재임기간만 50년이 넘은 왕으로 2명의 왕후와 4명의 후궁이 있었습니다.가족들을 편파적으로 대한 영조는 그의 여인들은 어떻게 대했는지 그녀들의 일생은 어떤지를 알아보겠습니다.1. 정성왕후는 영조의 외면으로 외롭게 살다 외롭게 돌아가시다.그녀는 달성부원군의 딸로 1693년에 태어납니다. 13세때에 두 살이 어린 연잉군(영조)과 혼례를 합니다. 당시 영조는 연잉군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었습니다.어린나이에 혼례를 한 부부들은 웬만해서는 사이가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도 영조는 연잉군시절부터 정성왕후를 싫어했습니다.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둘의 첫날밤에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을 보면서 손이 이쁘다며 칭찬을 해주었는데 정성왕후가 원래 양반의 딸로 태어나서 고생을 안 해서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 2024. 12. 4. 숙종의 사랑만 믿었던 악녀 장희빈 결국 숙종에게 버림받다 조선실록에도 기록되었을 만큼 장희빈의 외모는 그 시대에는 매우 아름다웠던 여인입니다.어린 나이에 궁녀로 들어와 숙종의 사랑으로 왕후까지 되었지만 그녀의 끝은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1. 서인. 남인. 그리고 숙종장희빈에게 사랑을 주었던 사람이 조선의 왕 숙종이므로 당시 정치적 배경과 장희빈을 분리해서 이야기를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당시 조선을 집권했던 당파는 서인과 남인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서인의 세력이 커지면 남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남인의 세력이 커지는 반대로 서인이 약해지는 구조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숙종은 환국정책을 펴서 서인세력과 남인세력의 반복적으로 교체시키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하게 한 왕이었습니다.숙종의 여인 하면 인현왕후와 장희빈.. 2024. 11. 21. 조선을 싫어 했던 여인 친일파 배정자 친일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이글에 나오는 여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들어가 일본을 의해 스파이 노릇을 제대로 한 배정자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 그녀의 성장과정1870년에 경남김해에서 태어난 배정자는 원래 본명은 배분 남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배지홍으로 김해 밀양의 아전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흥선 대원군을 지지한 사람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정권다툼을 했는데 결국 1973년 흥선대원군은 실각을 했고 명성황후의 집안 민 씨 일가의 보복으로 그녀의 아버지 배지홍은 역모죄로 처형을 당하고 그녀의 집안 식구들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이 충격으로 실명을 해버렸습니.. 2024. 11. 18. 북벌정책을 추진한 효종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아버지 인조와 조선의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눈으로 보고 피부 직접 느꼈던 왕입니다.그는 왕이 되어 왜 그렇게 북벌에 진심이어야 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청나라에서 형 소현세자의 사망 소식을 듣다.효종은 인조의 둘째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기전에는 봉림대군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 위에 소현세자가 있어서 젊은 나이에 자신이 왕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어 것입니다. 거기에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인질로 잡혀서 같이 8년동안 청나라에서 살았습니다.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켜서 더 이상 이들 형제와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둘 필요가 없으므로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립니다. 일단 소현세자가 먼저 조선으로 떠났습니다. 그 후 몇 달 뒤 봉림대군도 조선으로.. 2024. 11. 16. 왜 성종은 어우동만 죽여을까요~ 어려을 때 전봇대에 조선왕가의 스캔들 "어우동"이라는 19금 영화 포스트가 많이 붙어있었습니다.내용은 관심은 없었지만 저한테 그녀의 이미지는 야한 여자, 부도덕한 여자로 지금까지 각인되어 있습니다.간혹 역사가들이 어우동 그녀는 시대의 희생양이라는 주장을 할 때가 있습니다.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볼려고 합니다.1.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만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 딸이며 집안 부유하였습니다. 외모도 아름다웠다는 "용재총화"라는 책에 기록도 있습니다.조선은 웬만해서는 여인의 외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데 그만큼 어우동이 얼마나 이쁘지 증명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어우동"혹은 "어우을동"이라하여 실제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같이 어울려 통한다는 뜻으로 별명입니다. 그녀도 .. 2024. 11. 14. 나라를 팔아버린 친일파 윤덕영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친일파 하면 이완용인데 그보다 더 진독했던 부패관리 윤덕영을 잊지 않기 위해 글로 남깁니다.1. 권세의 시작윤덕영은 1873년에 태어나 1894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에 오릅니다. 윤덕영의 집안이 좋은 편이라 일본 조사사찰단으로도 임명되기도 하고 돌아와 비서관등으로 일을 했습니다. 거기에 동생인 윤택영 딸인 조카가 순종 부인인 왕후로 책봉이 되기도 합니다. 윤덕영은 빠른 승진과 황후가 조카딸이어서 궁중을 손아귀에 넣게 됩니다. 황후의 아버지 윤태영 보다 윤덕영이 황후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렸습니다. 2. 지독한 일본 앞잡이 우리나라는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 늑약을 했습니다. , 그리고 5년 후 1910년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쳬결되.. 2024. 11. 10. 혜경궁홍씨 한스러운 마음을 견디며 살아노라 혜경궁홍 씨는 조선의 22대 왕 정조의 어머니자 조선의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의 부인이었습니다. 한중록 작가로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여인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린나이 궁으로 들어가 모진 삶을 버티면서 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1. 간택되다.해경궁 홍씨는 1735년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 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명문가였으나 살림의 형편은 어려운 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을 때부터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녀의 총몀함을 알아봤던 할아버지 홍현보는 그녀를 더욱더 아꼈다고 합니다. 학구적인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그녀의 재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당시 소론 과 노론의 당파가 심했던 시절 혜경궁 홍 씨 집안은 노론 출신이어서 그의 배경으로 세자.. 2024. 11. 9.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