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금융계의 황제’였는가, ‘식민 권력의 브로커’였는가― 한상룡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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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조선 금융계의 황제’였는가, ‘식민 권력의 브로커’였는가― 한상룡의 실체

by 5914 2026.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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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그를 “조선 금융계의 황제”라 불렀지만, 학계의 평가는 훨씬 차갑습니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본 패전 직전까지 식민지 조선의 금융과 권력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인물, 한상룡 
한상룡은 다 쓰러져가는 조국인 조선을 버리고 일본바라기를 한 인물의 행보를 따라 가보려고 합니다.

 

 

1. 출발선에 이미 놓여 있던 것들

한상룡은 1880년 10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청주였습니다. 그는 관립 영어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1899년 일본의 사립 세이조학교에 편입했으나 1900년 중퇴합니다. 이 짧은 학업 경력은 훗날 그의 이력을 설명할 때 늘 간단히 언급되지만, 실제로는 그가 평생 활용한 가장 중요한 자산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근대 관료제와 금융 용어에 대한 이해는 이후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도구가 됩니다.

가계에 대한 이야기는 늘 조심스럽습니다. 부친 한관수가 규장각 부제학이었다는 표현은 사전류에 직접 명시되지는 않지만, 오래된 신문과 칼럼에서는 사후 추증의 형태로 반복 등장합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확정적 사실로 단정하기보다는, 당대 엘리트 가문에 속했다는 정황 정도로 처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완용과 이윤용이 그의 외삼촌이라는 친족 관계는 여러 2차 자료에서 교차 확인되며, 이를 부정하는 연구는 거의 없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상룡은 출발선에서 이미 일반 청년들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학력, 언어 능력, 그리고 황금 같은 인맥.
이 세 가지는 이후 그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됩니다.

2. 관직에서 은행으로, 결정적 방향 전환

1901년, 그는 사립 중교의숙에서 영어 교사로 일합니다. 이듬해에는 외부 참서관으로 관로에 진입합니다. 겉으로 보면 비교적 평범한 개화기 엘리트의 경로처럼 보이지만,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관직은 그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 우총무로 취임합니다. 이 순간이 그의 인생을 가르는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1905년에는 취체역 겸 총무부장,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는 전무취체역으로 올라섭니다. 관과 은행, 행정과 금융을 동시에 이해하는 인물로서 그는 점점 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한성은행은 흔히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 논쟁 속에 등장하는 상징적 기관입니다. 그 상징의 중심에, 그리고 실질적 운영의 중심에 한상룡이 있었습니다.

3.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이름이 붙기까지

병합 이후 한성은행의 외형은 급격히 커집니다. 그 배경에는 합방 유공자 보상의 성격을 지닌 자금, 즉 은사공채와 은사금이 있었습니다. 일부 글에서는 자본금이 “몇 배로 늘어났다”는 식의 수치를 강조하지만, 학술적으로는 이런 표현을 경계합니다. 출처마다 배수가 다르고, 정확한 계산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보다 신중하게 말합니다. ‘대규모 증자’.
그러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자금의 성격이었습니다. 이 돈은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조선인 상층에게 지급된 보상이었고, 그 자금이 은행을 통해 다시 식민지 경제 구조 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한성은행은 어느새 민중의 눈에 ‘조선 귀족들의 은행’으로 비치게 됩니다. 금융기관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의 보상 창구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이미지 변화는 이후 한성은행과 한상룡을 둘러싼 평가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4. 우상과 철학, 그리고 모방의 방향

한상룡이 존경하고 추종했던 인물은 일본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적 존재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였습니다. 그는 시부사와를 ‘근대 일본을 만든 경제인의 전형’으로 인식했고, 그 사상과 경영관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려 했습니다.

‘일생일업’이라는 표현 역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다만 이것을 시부사와의 직접 인용이나 철학적 선언으로 단정하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한상룡 관련 자료와 당대 보도에 반복 등장하는 표현으로, 그가 자신을 어떻게 포장하고 설명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1930년대 장충단 일대에서 벌어진 각종 현창 사업은 이를 더욱 분명히 보여줍니다. 항일 추모의 공간이었던 장소는 점차 식민 충성의 무대로 재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인 엘리트 네트워크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습니다. 기억은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 아니라, 설계되고 관리되었습니다.

 

 

5. 균열의 시작, 그리고 은행의 종말

1923년 관동대지진과 이어진 장기 불황은 식민지 금융권 전반에 치명타를 안깁니다. 한성은행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영업 부진과 구조적 한계 속에서 은행은 점점 정리 대상이 되었고, 결국 1928년 식산은행으로 편입됩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한 은행의 실패가 아니라, 식민지 금융 재편의 전형적 사례로 분석됩니다. 한상룡이 “내 생애와 은행은 둘이 아니다”라고 말할 만큼 애착을 보였던 시대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6. 동상과 기념비, 기억을 설계하다

식민지 권력은 항상 공간과 상징을 통해 자신을 각인시켰습니다. 1929년 전후, 탑골공원에는 메가타 다네타로 동상이 세워집니다. 제막의 정확한 월·일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 동상이 공공 공간에 설치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여러 도시사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1933년 무렵 장충단의 변용 역시 같은 흐름에 놓여 있습니다. 항일의 기억은 지워지고, 충성의 서사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총독부 청사 중앙홀에 설치된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사이토 마코토의 동상 역시 일본 조각가 아사쿠라 후미오의 작품으로 확인되며, 설치 시점과 배치에는 자료 차이가 있으나 후기 식민지기의 상징 정치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조선인 엘리트의 협력은 단순한 강요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적극적인 참여와 기획이 있었습니다.

7. 전시 체제의 얼굴이 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한상룡의 역할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합니다. 그는 시국강연에 나섰고, 국방헌금과 각종 헌납 운동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임전보국단 고문 등의 직함은 그가 단순한 금융인이 아니라 전시 동원 체제의 얼굴 중 하나였음을 보여줍니다.

1942~1943년 징병제 옹호 담화 역시 여러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부인 이용경의 애국금차회 활동과 훈·포상 기록도 2차 자료를 통해 포착됩니다. 세부 훈장명에는 차이가 있지만, 전시 협력 가문이라는 인상은 분명히 남았습니다.

8. 제도권 권력의 정점

그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추원입니다. 1927년부터 1941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이후 고문으로 승진합니다. 이는 조선인 협력 엘리트가 도달할 수 있는 제도권 권력의 핵심부였습니다.

패전 직전, 그는 귀족원 칙선 의원이 됩니다. 연도는 1944년 또는 1945년으로 혼재하지만, ‘패전 직전 칙선 의원’이라는 표현이 가장 안전합니다. 상징적으로 이것은 식민지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지점이었습니다.

9. 해방 이후, 그리고 기록의 공백

해방 이후 그의 행적은 상대적으로 조용합니다. 반민특위 체포나 재판 기록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는 1947년 10월 30일 사망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이후 친일 인명 정리에서 빠짐없이 거론됩니다.

침묵은 무죄를 의미하지 않았고, 망각은 면죄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10. 왜 ‘친일 예속자본가의 전형’인가

한상룡의 능력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언어, 조직력, 금융 감각, 그리고 시대를 읽는 감각까지 그는 분명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능력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었느냐는 점입니다.

그의 금융 활동과 상징 정치는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전시 동원을 일상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 사건과 자료가 누적된 결과로서 ‘친일 예속자본가의 전형’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은  한상룡이라는 인물은  “조선 금융계의 황제.” 보다 “식민 권력과 예속 경제를 연결한 브로커.”라는 말이 어울리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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