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역사를 가르치고, 오래된 기록을 들춰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역사 교사입니다.
오늘은 교과서 한 줄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은행 하나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와, 동시에 ‘식민지 금융의 하수인’이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함께 짊어진 은행, 바로 한성은행(漢城銀行)입니다.
이 은행의 130년 역사는 단순한 금융사가 아니라,
이 땅의 근대화가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타협을 했으며,
결국 어디에서 무너졌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압축 파일과도 같습니다.

1.개화의 문턱에서 태어난 은행
1897년의 종로 서린동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습니다.
전차도 없고, 은행 간판도 낯설던 시절, 조선은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근대 국가를 자처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한성은행은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주식회사라는 제도, 자본을 모아 운영한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로서는 하나의 실험이었고, 조선이 스스로 근대 세계로 들어가 보겠다고 띄운 작은 배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물론 ‘천일은행’과의 선후 관계를 두고 지금도 논쟁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1995년 한국기네스협회가 한성은행을 ‘한국 최초의 법인’으로 공식 인정한 이후, 이 은행이 지닌 상징성만큼은 쉽게 부정되기 어려워졌습니다.
2.웃지 못할 시작, 당나귀가 담보가 되다
은행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솔직했습니다.
“돈을 맡기면 이자를 준다니, 그게 말이 되나?”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린다니, 속임수 아니냐?”
이 낯섦 속에서 탄생한 일화가 바로 ‘당나귀 담보 사건’입니다.
대구에서 물건을 사러 온 상인이 자금이 부족해 은행 문을 두드렸고, 그가 내놓은 유일한 담보는 자신이 타고 온 당나귀 한 마리였습니다.
은행 내부에서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살아 있는 짐승을 담보로 삼을 수 있느냐는 보수적인 시선과, 무엇이든 시도해 보지 않으면 은행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개혁적인 판단이 맞섰습니다.
결국 은행은 당나귀를 맡고 돈을 내어주었고,
이 소박한 선택은 한국 금융사에서 첫 ‘담보 대출’이라는 기록으로 남게 됩니다.
3.은행은 스스로를 설명해야 했다
한성은행은 손님이 알아서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은행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은행이 먼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97년 3월 25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광고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솔직합니다.
예금, 대출, 담보, 보증이라는 개념을 하나하나 풀어 설명하며, 심지어 물건의 증명서만 맡겨도 돈을 빌려주겠다는 ‘재고 금융’ 개념까지 소개합니다.
이 은행은 분명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속도를 조선 사회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4.전환점, 한상룡의 등장
한성은행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시점은 1903년입니다.
이때 실질적인 운영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한상룡이었습니다.
한상룡은 능력 있는 금융인이었고, 동시에 일본 금융권과의 연결 고리를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등장 이후, 한성은행은 점차 ‘조선의 은행’이 아니라 ‘조선을 관리하는 은행’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5.친일 귀족들의 은행이 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성은행은 노골적으로 변합니다.
한상룡은 합방 공로자들에게 지급된 은사공채를 은행 자본금으로 흡수했고, 이완용·이윤용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대주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한성은행은 더 이상 조선 상인들의 자금 사정을 고민하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친일 귀족들의 자산을 관리하고, 일본 자본이 조선 사회로 침투하는 데 필요한 금융 통로로 기능합니다.
산미증식계획의 자금 흐름을 뒷받침했고,
국방채권을 강매하며 조선인의 피와 땀이 전쟁 자금으로 전환되는 데 앞장섰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성장기였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금융 기계의 부품이 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6.몰락은 예고 없이 오지 않았다
1920년대에 접어들며 한성은행의 균열은 분명해집니다.
방만한 대출, 일본 자본 의존 구조, 그리고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닥친 금융 공황은 은행을 한순간에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1928년, 결국 조선총독부는 한성은행을 정리 대상으로 지목하고, 경영권은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갑니다.
한상룡은 평생을 바친 은행을 잃었고, “내가 은행의 주인인지, 은행이 나의 주인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긴 채 무너집니다.
식민지 자본가의 충성은, 필요 없을 때 언제든 폐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7.이름은 사라졌지만, 법통은 남았다
1943년, 한성은행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은행의 법적 생명은 조흥은행으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 금융의 중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2006년, 조흥은행은 신한은행과 합병합니다.
흥미롭게도 신한은행은 자신의 출발점을 1982년이 아닌, 1897년 한성은행의 설립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치는 신한은행의 간판 뒤에는,
당나귀를 담보로 삼던 그 은행의 법적 혈통이 여전히 흐르고 있는 셈입니다.
8.한성은행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한성은행은 두 얼굴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근대 금융의 틀을 마련한 선구자였고, 동시에 식민지 수탈에 협력한 공범이었습니다.
자본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누구를 위해 쓰이느냐에 따라
그 자본은 역사의 편이 되기도, 반역의 기록이 되기도 합니다.한성은행의 비극은 자본이 스스로의 영혼을 잃었을 때 어떤 결말을 맞는지를 보여준 은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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