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경궁홍씨 한스러운 마음을 견디며 살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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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혜경궁홍씨 한스러운 마음을 견디며 살아노라

by 5914 2024.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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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홍 씨는 조선의 22대 왕 정조의 어머니자  조선의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의  부인이었습니다. 
한중록 작가로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여인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린나이 궁으로 들어가 모진 삶을 버티면서  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1. 간택되다.

해경궁 홍씨는 1735년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 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명문가였으나   살림의 형편은 어려운 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을 때부터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녀의 총몀함을  알아봤던 할아버지 홍현보는 그녀를 더욱더 아꼈다고  합니다.  학구적인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그녀의 재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소론 과 노론의 당파가 심했던 시절  혜경궁 홍 씨 집안은 노론 출신이어서 그의 배경으로 세자빈이 가능했지만  훗날 양날의 칼처럼 일생의  아픔을 짊어지어야 할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21대 왕이었던 영조는 그녀의 아버지과  처음에는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고 영조는 홍봉환에게 호감을  갖었던 거 같습니다, 영조는 세자빈을 홍봉한 딸로 내정하고 간택을 일산처리로 진행합니다. 사도세자 생모와 그의  누나인 화평옹주가 간택자리도 가기 전에  혜경궁 홍 씨를 불러다가 예절 교욱을 시켰다고 합니다. 
혼인식은 1744년 1월 11일에 이루어졌고 혜경궁 홍씨는 세자를 따라 창경궁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그들의 나이 10세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혼인 당시 등과도 못하고 9품직에  머물러으나  왕실과혼인 후 여러 번 떨어진 문과 전시에  합격하면서 출셋길이 열렸습니다.  
 

2. 고달픈 궁중 생활 

혜경궁 홍 씨는 바른고 어진 성품으로  궁궐 안에서도  이쁨을 독차지했습니다.  실지적인 시어머니 격인 영빈이 씨와  시누이들인 화평, 화협, 화원옹주들이 그녀를 이끌어 주었지만  규법이 엄중했던 궁의 생활은  10살 여자아이에게  만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행위자체만으로도 긴장의 연속인데  아침마다 세자의 늦장 피는 태도 때문에 그녀의 긴장감은 더 하였습니다.
그래도 영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화평옹주 때문에 궁중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었는데  화평옹주가 난산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궁중 생활은 시아버지인 영조와 남편인 사도세자의 갈등 때문에  긴장의 연속의  생활이 되어보고 맙니다.

3. 아버님은 아들에게 왜 그렇게까지~

영조는 사도세자를 마흔이 넘은 나이에  귀하게 얻었고  사도세자의 총명함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가  사도세자를 한심하게 보면서 사도세자를 괴롭혔습니다.   혜경궁 홍 씨는 한중록에  그 원인은 영조가 100일도 안된 세자를 생모인 형빈이씨과 떨어뜨리고 사이가 안 좋았던 경종의 두 번째 부인인 선의왕후 어 씨가 살았던 "저승 전 "에 살게 하고 경종과 선의왕후가 모셨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를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세자의 음식을 담당했던 소주방은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취선당이었습니다.  영조는 왜 이렇게 까지 하면서 형인 경종을  자신이  독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경종을 모셨던 궁인들은 사도세자에게 공부보다 무술놀이에 빠지 하고 생모인 영빈이 씨를  비방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 영조가 분노하여 궁인들 중  최상궁과 한상궁에게 형벌을 내리게 하여 그녀들은 형벌을  받다가 죽고 맙니다.  이를 지켜본 사도세자도 충격이 컸고  영조는 이일로  세자의 불신과  극심한 꾸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화평옹주가 생전에 있을 때는 영조와 세 자 사이을 어느 정도 완충 역할을 하였는데~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둘의 사이는 더 심화됩니다.  세자가 15세가 되자 대리청정을 명합니다,  그러나  대리청정은 세자에게 정말 공포였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 뒤에 앉아서  세자의 판단에  토를 달았고  많은 대신들 앞에 면박을 주는일 이 허다했습니다.  이런 숨 막힌 대리청정을 13년 동안 했습니다.  

4. 점점 미쳐가는 사도세자

영조는 가족을 심하게 편애하여  가족들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사도 세자를 심하게  이뻐했으며  상관이 없었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조의 헤아릴 수 없는 감정 기복은  세자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항상 눈치를 받야 했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던 사람들이 차츰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울화증은 심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여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내관을 죽여  그의 목을 들고 다니는 사건도 있었고   자신이 아꼈던 후궁도 죽입니다.   옷을 못입는 병도 생겼습다.  한번 옷을 입을 때마다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혜경궁 홍 씨에게도 바둑판을 던져서 실명의 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관을 만들기도 하고  그의 광기는 궁안의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칼을 들고 영조의 처소에 들어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생모인 영빈이씨는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일들을  모두 밝히여서 결국 사도세자를  귀주안에서 굶어 죽게 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았던 혜경궁 홍씨에 마음이 어떤지는 헤아리기가 힘듭니다.  

5. 아들을 지키기 위해 

혜경궁 홍 씨는 사도세자 사이에서  2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인 아들은 일찍 죽고  그다음에 낳은 아들이 정조입니다.
사도세자가  죽고 즉시 폐서인이 되어  친정으로  어린 자식들과 들어갑니다.  몇 달 후 영조는 죽은 자를 사도세자라 하여 다시 복위시키고 혜경궁홍 씨 모자를 다시 궁으로  불러 드립니다.  혜경궁홍씨는  아들을 위해 영조에게 우리 모자의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이라고 말을 합니다.  원망대신 고맙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조 또한  너를 보기가 어려웠는데 내 마음을 편히 해주니 아름답구나라고 대답 합니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는 어린 정조를 영조가 사는  경희궁으로 데려갈것을 부탁합니다.  그녀는 영조와 아들 정조가  둘의 유대감이 생겨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지키기위해  자신의 품에서 떠나 보냈던 것입니다.  정조는 경희궁에서 할머니인 영빈 이씨의 돌봄을 받았고   어린 정조  또한 혜경궁 홍씨  기대만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얼마 후 영조는 일찍 죽은  큰 아들 및으로  정조를 양자로 입적시켜버립니다.  하루아침에 혜경궁 홍 씨의 아들이 조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받아들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조에게 집착하는 화완옹주의 태도를 보면서도  참아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1776년 정조는 왕이 되었습니다.

6.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공표합니다.  정조의 효심은 깊어지만  현실적으로  정조가  어머니인 친정을  쇠퇴시키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혜경궁 홍 씨는 이를 지켜보면서 이런 모든 일들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서  한탄을 하였습니다.  아들 정조의 암살사건도 지켜봐야 했고  사랑했던 아들 정조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한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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