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을 때 전봇대에 조선왕가의 스캔들 "어우동"이라는 19금 영화 포스트가 많이 붙어있었습니다.
내용은 관심은 없었지만 저한테 그녀의 이미지는 야한 여자, 부도덕한 여자로 지금까지 각인되어 있습니다.
간혹 역사가들이 어우동 그녀는 시대의 희생양이라는 주장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볼려고 합니다.
1.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만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 딸이며 집안 부유하였습니다. 외모도 아름다웠다는 "용재총화"라는 책에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은 웬만해서는 여인의 외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데 그만큼 어우동이 얼마나 이쁘지 증명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우동"혹은 "어우을동"이라하여 실제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같이 어울려 통한다는 뜻으로 별명입니다.
그녀도 다른 여인네들처럼 혼기가 차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태강수"는 종친을 이르는 칭호입니다.
남편인 이동은 태종 이방원의 증손자로 왕가의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어우동이 기생으로 알고있지만 그녀는 조신해야 할 왕가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러나 어우동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못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조선의 왕 성종에게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상소까지 올립니다.
양반이나 왕가의 종친들은 왕이 이혼을 허락을 해야지 이혼이 가능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웬만해서 왕에게 이혼신청을 하지도 않는데 어우동의 남편은 그녀와 이혼을 원했습니다
이유는 어우동이 집에서 일하는 그릇을 만드는 은장이가 있는데 자신이 집에만 없으면 어우동은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그릇을 만드는 것을 칭찬을 하여 유대감을 쌓은 뒤 내실로 끓어 들려 음탕한 짓을 했으니 더 이상 같이 못 산다는 이유였습니다. 왕실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종부시에서 조사에 들어갔는데 남편 이동의 말은 모두 거짓으로 밝혀지고 오히려 이동에게 다른 여인이 있어서 꾸며낸 일이라는 것을 밝히 지게 됩니다. 성종은 이혼을 불허했고 둘이 다시 잘해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우동은 이미 집에서 쫓겨나 친정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남편 이동은 그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2.사람이 산다면 얼마나 산다고
어우동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친정에서 한 많은 마음으로 살아가는데 한 여종이 그녀에게 "사람이 살며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상심하고 탄식하고 계십니까" 라고 하면서 요 옆에 오종년이라는 사람이 전 남편 태강수 이동보다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으니 베필 삼아 보는 게 어떤냐며 그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어우동은 여종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종연을 만났습니다. 이 시점으로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욕구를 채웠습니다.
하루는 지나가는 남자가 어우동을 보고 반해서 따라오는데 어우동은 그남자를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끌어들여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 남자의 신분이 방산수 이난으로 남편과는 6촌 형제로 왕실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별거 중인 남편이지만 아직 그녀는 왕실 족보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근치상간이 패륜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난은 어우동이 누구인지도 알면서 그녀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우동의 저고리 위에 시까지 적을 정도로 이남은 어우동의 사랑은 애틋했습니다.
" 물시계는 똑똑똑 밤 기운 청아한데 흰구름
활짝 걷히니 달빛 환해라
빈방 고요한 중에 향기가 남아 있어 오늘도
꿈에도 그리운 정 그려보오"
이런 글귀를 받은 어우동은 감격했는지 어우동도 이난을 위해 사랑의 증표를 남깁니다,
어우동 한쪽 팔에 이난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깁니다, 이때 문신의 의미는 형벌의 의미이긴 한데 왜 어우동은 사랑의 증표로 문신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좀 놀라웠습니다.
그때는 바늘 하나하나 찌를때마다 고통이 왔을 텐데 이 아픔을 견딜 만큼 널 사랑한다는 의미인지~
그녀의 몸에는 이난 말고 두 명의 이름의 문신이 더 있습니다. 반대쪽 팔에는 박강창 등에는 감의향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여러 남자들을 만났는데 왕가 사람부터 노비까지 마음에 드는 남자들을 만났습니다,
실록에만 기록된 사람만 17명으로 어우동은 조선의 왕가의 큰 스캔들이 만들어 버린 여인이 되어버렸습니다.
3. 성종 귀에 들어가다
당연히 어우동이 17명이나 만났는 동안 장안의 소문을 났을 것이고 그 소문은 성종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기생도 아니 왕가의 며느리의 행실의 소문이니 성종은 바로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죄목은 어우동과 이난의 불륜 및 근친상간이었습니다. 둘은 도망을 갔지만 결국에는 잡혔습니다.
어우동은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함께했던 남자들을 이야기하였고 그들도 의금부에 잡혀왔습니다.
왕가의 며느리인 지 몰라다며 변명을 하고 나름 억울하다며 호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곤장 몇 대 맞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어우동은 교형를 당했습니다.
교형이랑 사람들 앞에서 밧줄로 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입니다.
어우동이 잘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 시대에도 교형을 내릴 정도의 형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법에 근거로 보면 어우동은 곤장 100대 정도 맞을 형벌이면 됩니다. 맞다가 죽을 수 있으나 사형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도 성종에게 사형은 너무 심하다며 반대를 했지만 결국 사형을 내렸습니다.
4. 여인에게만 가혹한 성종
어우동은 잡힌 뒤 자기랑 만나 남자들 이름을 쉽게 말했던 것은 자기를 처벌하려면 그들도 똑같이 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예상하여 그들을 무겁게 처벌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죄도 무겁게 처벌이 내려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례도 있었습니다. 허나 어우동의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성종은 경국대전이라는 조선의 법전을 완성한 인물로 그 법전대로 어우동을 처벌하지 않고 더 심한 형벌을 왜 내려버렸습니다.
어느 사람은 폐비윤 씨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어우동에게 화풀이했다는 애기도 있습니다.
조선 초기였던 이 시대는 여인들이 후기의 여인들보다 좀 더 자신을 표현했던 시기입니다. 정조를 심하게 강요받지도 않았고요, 그러나 성종은 자유로운 여인들보다 유교적이고 가정적인 여인들을 더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본보기가 어우동을 많이 보는 이들 앞에서 죽인 것 아닐까요
훗날 성종은 자신의 부인이자 연산군에 어머니 윤 씨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위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이때 성종은 여인들의 재혼을 금지하는 법도 만들었습니다. 간혹 여인들이 남편이 죽으면 생계를 위해 재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금지된 것입니다.
어우동의 행동은 오늘날에 와서도 비난이 큰 행동이기 하지만 그 여자의 바람기가 문제가 아니라 성종이 편파적인 형벌이 더 문제였습니다. 죽이려면 어우동과 함께 했던 남자들을 같이 죽여야지 공평한 거 아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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